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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4년 9월 발간된 독립잡지 DOMINO 6호에 실린 글입니다. 미교정/미교열 원고입니다. 이 글의 공개에 흔쾌히 동의해주신 DOMINO 동인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직접 허락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문을 퍼가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링크의 확산은 언제고 환영합니다.







이미 한국에서는 원어 그대로 통용되고 있으니 별 의미 없는 고민이긴 하지만, ‘Outing’에 딱 맞는 번역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 단어는 성소수자가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벽장 속’ 상태의 은유를 확장한 것인데, 스스로 벽장을 나오는 ‘커밍아웃’과 달리 타인을 벽장으로부터 추방한다는 뜻이다. 즉 어떤 성소수자의 동의 없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누설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벽장으로부터 ‘내보낸다’는 의미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아웃팅을 하려면 우선 벽장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아웃팅은 기본적으로 다른 성소수자의 행위이기가 쉽다. ‘아웃팅’이라는 말이 탄생한 계기도 그랬다. 동성애자 언론인들이 반동성애 운동이나 발언을 일삼는 동성애자나 AIDS 위기를 맞은 커뮤니티를 외면했던 명사의 성정체성을 폭로했고, 타임(Time) 지의 칼럼니스트가 이 행위를 자기 스스로 정체성을 시인하는 커밍아웃과 결이 다른 ‘아웃팅’으로 호명했다. 동성애자가 HIV를 옮기는 괴물이 되어가던 90년대 초 미국에서 아웃팅은 동성애자가 도처에 있는 평범한 사람임을 보이기 위한 논쟁적인 운동전략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통용되는 아웃팅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어디서든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 ‘오픈리’보다, 누구나 비트랜스젠더-이성애자라는 사회적 통념에 편승하여 정체성을 숨기는 ‘벽장 속’ 성소수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한국에서 이 행위는 위선적인 명사보다 ‘평범한’ 벽장 속 성소수자의 존재를 누설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어떤 성소수자가 개인적으로 밝혔거나, 아니면 우연히 알려진 그의 정체성을 동의 없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다른 이에게 알리는 행위 일체가 ‘아웃팅’인 셈이다. 그리고 한국의 벽장 속 성소수자에게 이 행위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나쁜 짓이다.

 

상대를 믿고 개인적으로 털어놓은 사실을 남에게 옮기는 행위가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마녀사냥>의 허지웅이 말하는 대로 아웃팅은 분명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누설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이를 막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가십을 생각해보라. 그 소문의 내용 또한 누군가 상대를 믿고 내밀하게 털어놓은 비밀이었을 것이다. 돌고 도는 소문 속에서 그 믿음을 배반한 최초의 제보자나 이 말을 옮기는 전달자의 인격에 대한 평가를 많이 깎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소문의 전파가 인격과 예의범절 이상의 문제가 되지는 않고, 딱히 금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유독 아웃팅의 경우 취급이 달라진다. 아웃팅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면 안 되는 것”이라거나, “가뜩이나 사회적 약자로 위축되어 있는 성소수자에게는 폭력 그 자체”이다. 특히나 당신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에 반대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습득한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아웃팅을 비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도 들어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웃팅은 범죄”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아웃팅은 범죄”는 어떻게 보면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남긴 슬로건 중에서 가장 대중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퀴어퍼레이드도 한 번 나와 보지 않은 ‘은둔’ 성소수자에게도 통용되는 인권운동의 구호는 이것이 유일할 테니 말이다. 이 유명한 슬로건은 한국 여성동성애자 인권운동단체였던 (舊) ‘끼리끼리’에서 2003년경 시작한 ‘아웃팅 방지 캠페인’의 일환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끼리끼리’는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호간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성폭력 방지’와 ‘아웃팅 방지’를 함께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끼리끼리’가 홈페이지에 아웃팅 방지 사례 모으기 게시판을 열면서 이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각종 레즈비언 인권행사에 저 슬로건이 등장했다. 첨예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진영을 넘어서 인접 운동권에서도 아웃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제고했다. 지금은 비단 성소수자가 아니라도 성노동 여성이나 ‘일베’ 활동자와 같이 사회적으로 낙인된(stigmatized)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행위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웃팅으로 호명되고, 그 행위가 ‘아웃팅’이라는 기술은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아웃팅을 비난하는 논거는 간단하다.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서 성소수자라는 사실의 누설은 그 성소수자가 아직 각오하지 않은 인간관계의 단절, 혐오로 인한 박해와 범죄, 경제사회적 차별 등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끼리끼리’의 아웃팅 방지 사례 모으기 게시판에 모여든 피해사례는 협박이나 폭력 같은 악의적이고 범죄적인 아웃팅부터 단순히 비밀의 누설로 소원해진 인간관계에까지 다양했다. 특히 개인이 혐오와 차별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비교적 적은 청소년기 피해의 심각함이 이 주장의 당위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진보진영 및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몇 차례 공개적인 비판 끝에 성소수자의 생활기반을 파괴하는 폭력인 아웃팅이 있어서는 안 되고, 이를 자행한 자를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규준이 확립되었다. 아웃팅을 대하는 이 진영의 논리는 성폭력에 대한 방식과 많이 닮아 있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성소수자 단체의 활동가를 대할 때도 아웃팅은 항상 조심해야 하는 행위가 되었다.

 

그런데 아웃팅 방지 캠페인이 막고자 했던 아웃팅은 과연 무엇일까? ‘아웃팅은 범죄’라는 슬로건이 우리 머릿속에 흔히 그리는 도식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드러내어 위해를 가하려는 악의를 가진 아웃팅 행위자가 있고, 성소수자는 그 행위에 희생된 피해자라는 도식 말이다. 물론 아웃팅이란 행위가 범죄와 엮일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이미 협박, 성폭력, 집단 폭력 등 범죄로서의 비난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범죄적 아웃팅이 아닌 경우에도 정체성의 누설로 인한 어떤 피해는 구제될 수 있다. 가령 국가기관, 언론, 인터넷 서비스 등에서 일어나는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누설된다면,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사적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발달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이와 같이 기존의 법체계 안에서 비난가능성을 담지한 정체성의 누설행위를 근거로 삼아, 이 비난가능성을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비범죄적인 아웃팅으로 확장했다. 아웃팅을 하겠다며 금전을 갈취하는 협박, 특정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밝히는 언론 기사, 사적인 자리에서 일어나는 누군가의 정체성에 대한 ‘카더라’. 이들은 발생하는 배경이나 결과로 인한 피해 양상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고, 따라서 별개로 취급하여 대응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 캠페인은 별개의 사안들로부터 ‘아웃팅’이라는 성소수자의 동의 없는 정체성의 누설행위를 공통분모로 포착해 일괄적으로 비판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법규범 하에서 통제되는 범죄적이거나 공적인 아웃팅이 아닌,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비범죄적인 아웃팅은 경각심을 가져야 할 새로운 부정의로 조명된다.

 

마치 술자리의 가십처럼, 범죄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은 아웃팅은 그 성격상 비난하기가 애매할 때가 많다. 물론 이러한 사적인 아웃팅 또한 예상치 못한 피해를 불러올 때가 있지만 그 피해가 아웃팅 상황에서 의도되었거나 예견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 비범죄적이고 사적인 아웃팅은 부모나 친구에게 정체성을 누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로 인한 피해 또한 부모 및 친구와의 감정적인 마찰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웃팅 방지 캠페인 하에서 범죄적이고 공적인 아웃팅의 때로는 파멸적인 결과는 모든 아웃팅을 비판하는 근거가 됨으로써, 이러한 사적인 아웃팅에 대해서도 범죄 수준의 강력한 비난가능성을 부여한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 하에서 모든 아웃팅은 수위와 피해양상을 가리지 않은 채 그 자체로 범죄이며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침해 행위가 된다. 이처럼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아웃팅이라는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제고하는데 그치지 않고, 범죄적 행위라는 규탄과 피해의 보고를 통해 다양한 사건을 ‘아웃팅’이라는 하나의 지표 하에 인권사안화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아웃팅이 공통적으로 침해한다고 하는 성소수자 인권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 캠페인은 각각의 범죄가 침해하는 법익이 아닌 다양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아웃팅’이라는 행위 일체를 인권침해로 지목하면서, 성소수자가 어떤 상황에서든 정체성을 ‘숨길 권리’를 새로이 주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이타적이고 영웅적인 행위가 ‘커밍아웃’이라면, 이 권리에 대한 침해가 바로 ‘아웃팅’이라는 이름의 범죄인 것이다. 이렇게 창설된 ‘숨길 권리’는 벽장 속으로 수용되면서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과 혐오에 노출될 수 있다는 벽장 속 성소수자의 두려움과 긴밀하게 결합했다. ‘숨길 권리’는 정체성의 비밀을 지킬 의무를 다른 이에게 지우거나 권리 침해의 방지를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에 벽장은 이 개념을 환영했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생각하는,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알게 된 사람이 그 보안을 지키는 것은 배려나 호의가 아닌 당연시되는 의무라는 보편적 원칙은 이 과정을 거쳐 비교적 최근 형성되었다.

 

벽장 속 성소수자와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성소수자에게 이 ‘숨길 권리’에 대한 의문의 제기는 흔히 “커밍아웃 탈레반”과 같은 격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오기 마련이지만, 이 권리에는 문제가 없을까? ‘숨길 권리’는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상황이 성소수자가 받는 사회적 차별과 불이익의 원천이라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이 권리를 공개적으로 포기하는 대사회적 커밍아웃은 역으로 숭고한 이타적 행위가 된다. 그런데 커밍아웃의 동기는 그와 같은 사회적 포부와 이타적인 마음이기만 한 것인가? 올해 초 휴먼라이츠캠페인(HRC)의 LGBT 청소년 후원행사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배우 엘런 페이지는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듯해 보인다.

 

“저는 숨기는 것에, 그리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거짓말(lying by omission)에 지쳤습니다. 공개적으로 나서는 것이 두려워 지난 수년 간 괴로웠습니다. 영혼이, 정신이, 그리고 제 연애가 삐그덕거렸고요. 그리고 오늘 여기 계신 많은 분들과 함께 그 고통을 벗어납니다. 제가 비록 어리지만 그래도 그간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랑은,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기쁨은, 그리고 심지어 사랑의 고통마저도, 인간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선물이란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사랑을 완전히, 평등하게, 부끄러움이나 타협 없이 주고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이든, 공개적이든 커밍아웃의 가장 큰 동기는 자신을 부정하는 괴로움이다. ‘숨길 권리’는 잘 지켜진다 해도 현상유지에 그칠 뿐인 권리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비트랜스젠더 이성애자로 가정되는 사회적 통념이 있기에, 애초부터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는 평등하지 않다. ‘숨길 권리’가 가진 하나의 허상은 정체성이 비밀에 붙여지는 한 일종의 젠더 블라인드(gender-blind) 상태에서 성소수자가 차별을 피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하지만 사회는 젠더 블라인드하지 않기 때문에 ‘숨길 권리’의 관철로써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처음부터 경기장은 기울어져 있었던 셈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요체는 이 이성애자 쪽으로 ‘기울어진’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받는 차별에 대한 대응이다. 성소수자가 동성과 섹스하거나 성기를 성형하는 행위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자’, ‘트랜스젠더’와 같이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일군의 사람이란 점을 보여, 이를 기반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권리를 똑같이 쟁취한다는 것. 그렇기에 성소수자 정치의 핵심은 가시화다. 당신 주변에도 이렇게 많은 성소수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고, 이 사람들을 무시할 것이냐고 역으로 묻는다. 성소수자는 다른 사회적 소수자 집단과 달리 주로 비가시적인 요소에 의해 구분되기 때문에, 이 요소를 드러낼 것인지 숨길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다른 소수자 정치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수 있는 가시화가 첨예한 논점이 되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소수자가 권리를 요구하고자 한다면, 그는 우선 주체가 되어야 한다. 얼굴을 가린 익명의 괴물이 아닌,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의 주체가. 이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에 명사의 커밍아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이타적인 행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정체성의 누설 자체를 조심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를 성소수자의 기본적 권리나 인권보장의 방안으로 본다는 것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기본 전제인 가시화와 호환되지 않는 자가당착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일각이 제시한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반대로 비가시화를 권리화하고자 한 실패한 시도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벽장 속으로 수용되어 아직까지도 당위화된 아웃팅 방지 주장으로 살아남아 있으며, 그 당위성에 대한 일말의 의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혹자는 아웃팅 방지 캠페인의 자가당착과는 별개로, 벽장 속 성소수자에게 이 ‘숨길 권리’는 여전히 유용하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역시 정체성을 숨길 수만 있다면 사회는 젠더 블라인드하다는 허상에 수반된 착각일 뿐이다. 아웃팅을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드러나는 성소수자 없이도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상수 같은 것이다. 행동거지가 여성스러운 게이, 머리가 짧고 활달한 레즈비언이 학창시절 종종 정체성의 확증 없이도 혐오성 폭력에 노출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성소수자는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서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생겼거나 행동하기 때문에 차별과 혐오를 받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르는 낙인(sitgma)은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저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성별규범(gender norm)으로부터의 일탈에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는 낙인된 행동양식과 외모를 피해 달리 꾸미고 숨긴다. 비트랜스젠더 이성애자로의 패싱(passing)은 성별규범을 벗어난 모든 이에게 강요된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나 위해만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아니다. 오히려 이성애중심적 사회의 논리에 순응하여 정체성의 문제는 개인적 차원으로 은폐하라는 요구야말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핵심이다. 성소수자 개인이 이 ‘클로제팅(closetting)’의 요구를 수인하여, 정체성을 사생활화하여 공적 영역과는 완전히 분리한 삶을 추구한다고 하여 비난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모든 성소수자가 인권운동가가 될 의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성소수자 개인은 정체성의 공개와 은폐의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비밀은 공유되는 순간 비밀이 아니게 되듯이, 성소수자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의 보안을 지키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강요된 클로제팅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자기부정의 답답함으로 인해, 벽장 속 성소수자도 개인적 차원에서 커밍아웃을 지속적으로 감행하기 마련이다. 벽장 속 성소수자 개인의 관계망이 확장될수록 그 비밀의 통제가능성은 낮아진다. 정체성을 커밍아웃한 후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 각자의 사회적 관계망을 고려해야 하며, 설령 그 관계가 단절된다 하더라도 한번 알려진 비밀은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 공개한 정보는 더 이상 완전한 비밀이 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정체성이라는 비밀의 누설이 일어날지 예측하여 방지한다는 것은, 심지어 사회구성원이 서로를 감시하는 전체주의 국가체제에서도 완벽히 재현될 수 없는 조건일 뿐이다.

 

벽장 속으로 수용된 ‘숨길 권리’는 일단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자발적으로 공개된 후 일정한 한계 이상으로 노출하지 않을 것을 윤리적이거나 법적인 의무로 만들어 이 조건을 충족하고자 한다. 이 얼마나 어색한 모양새인가. 기껏 벽장을 스스로 열어젖혀 벽장 밖 세계와 교류하고자 하는 성소수자가, 벽장 밖에서 안을 무차별적으로 탐문할 수 없도록 ‘아웃팅 방지’라는 별도의 방호벽을 요구하는 것이. 그 방호벽이 완벽하다는 보장도 없다. 누설은 벽장과 방호벽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방호벽을 완전히 철거하고 벽장을 당장 열어젖힐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이 방호벽은 당연하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숨길 권리’를 보장하면 차별과 혐오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내포한 전제와는 달리, 아웃팅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와는 독립적인 사건이다. 의도치 않은 정체성의 누설이 필연적으로 차별과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이 ‘숨길 권리’는 어떤 성소수자가 차별과 혐오에 즉각 노출되는 사건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보호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하다. 누구나가 처음부터 능숙하게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시나 성소수자들이 개인적 삶에서 벌이는 곡예인 아웃팅의 예방을 ‘숨길 권리’라는 이름하에 당위적으로 요구한다고 해보았자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성소수자는 결국 그 곡예를 강요하고, 실패한 자에겐 처벌을 가하는 분위기와 구조를 상대해야만 한다. 그러니 역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비가시화의 욕망이 권리의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라는 문제의 본질마저 가리는 이 정서에, 그리고 정작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이 아닌 단초를 제공한 사람에게 더 크게 분노하는 이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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