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O :: for Sale

* 어제부터 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 차별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군네트워크)가 주축이 되어 한국의 동성애 처벌법인 군형법 제92조의6 '추행' 죄 폐지 1만인 입법청원을 시작했습니다. 군네트워크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추가 정보를 보실 수 있고요. 청원서는 여기서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추행' 조문이 왜 위헌적 악법인지에 관하여 설명하는 글을 쓰려다가, 작년 말 작업하여 올해 초 발간된 게이 매거진 '뒤로(DUIRO)'에 실었던 이 글이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고 지금 제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어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 취지에 동의해 교열내용을 포함한 텍스트 전문의 게재를 흔쾌히 허락해주신 뒤로 편집부와,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주신 CM 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링크와 본문에 첨부된 사진, 동영상들은 온라인 업로드를 위해 제가 추가한 것입니다. '뒤로' 구매 정보는 여기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텍스트에 더하여 편집부의 미려한 디자인을 거친 완성품을 보실 수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게이 육군장관'이 탄생하기까지

(게이 매거진 뒤로(DUIRO))




“변태적 성행위” 처벌,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

미군 내 동성애자 차별을

정면돌파한 사람들의 이야기




MECO




2010년대 한국에 사는 게이로서, 간혹 미국의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거둔 소기의 성취를 뉴스기사로 전해 듣고 부러워할 때가 있다. 올해 6월 미국에서는 “사랑이 이겼다(#LoveWins)”. 현직 대통령과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가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고,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인사들이 “삶은 나아진다(It Gets Better)”며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응원한다. 이런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미군 안의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적지향을 숨겨야만 했고, 밝혀지는 순간 군대에서 쫓겨나던 시기를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2011년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이 폐지되면서 그 시기는 끝났다. 거저 주어진 과실은 아니다. 미군 내 동성애자 차별 철폐 운동이 오랜 시간 공들여 거둔 성과였다.





미군 내 동성애자 탄압사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이하 DADT)” 정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미국 군대의 동성애자 탄압사를 전반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 긴 이야기다. 미군의 동성애자 탄압은 미국의 동성애 탄압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소도미법(Sodomy Law)”이라는 것이 있다. 특정한 단일법이라기보다는, 남-녀 사이의 (정상위) 성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성적 행위를 “변태적 성행위”로 규정하여 금지하고 형사처벌을 부과하는 법을 전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어원은 당연히,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이다. 열 명의 의인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을 남색 대상으로 제공하라고 요구한 도시 소돔. “변태적 성행위”에 대한 처벌이 도덕적 요청에 의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데에는 당연히 기독교적 전통의 영향이 있다.


소도미법은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개념보다 오래되었다.[각주:1] 미국과 유럽에서 소도미법은 ‘동성애자’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개인의 성적 일탈행위 전반을 처벌하는 법으로 존재했다. 물론 이성애자 법률혼 부부가 이 법에 의해 처벌받는 사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소도미법은 동성애자라는 개념이 생기고 나서는 사실상 이들을 표적하여 처벌하는 법적인 근거로써 기능했다.


1950년대까지 미국 50개 주 모두에 소도미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각 주별로 “변태적 성행위”를 규정하는 방식에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남성들 간의 항문성교를 처벌하지 않는 주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군대라고 예외일 리는 없다. 사회에서 처벌받는 것에 더하여, 군대 내에서 “변태적 성행위”는 군 기강을 해쳐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는 사유로 취급받았다. 이미 미국독립전쟁 시기에 “변태적 성행위”를 이유로 기소되어 군생활을 그만둔 장교들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군이 “변태적 성행위(sodomy)” 중에서도 게이스러움을 표적하여 전역사유로 명시한 것은 1921년의 일이다. 양차 대전을 겪으며 군사인력이 부족했던 1900년대 전반기였지만, ‘성적 타락’을 행한 증거가 발견된 여성스러운 남성병사는 이를 금한 미군 규정에 의해 전역대상자가 되었다. 2차 대전 동안 이 규정은 육, 해, 공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실효성을 가지고 집행되었다.[각주:2] 미군이 군대 내 (남성) 동성애 금지를 의회가 제정한 법률로 명문화한 것은 통일군사법전(Uniform Code of Military Justice)을 제정한 1950년의 일이었다.[각주:3]


전반적으로 1970년대까지 미국 군대 내에서 동성애 행위는 드러나는 순간 군사법정에 기소되며, 군대 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사유가 되었다고 서술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미국 동성애자들은 군대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으며, 드러나는 순간 군 기강을 해치는 존재가 되어 쫓겨났고, 사회적으로도 “변태적 성행위”를 행하는 자들로 규정되어 박해받았다.





레오나드 매틀로비치(Leonard Matlovich)




그가 스스로 선택한 묘비명은 마치 오늘 갓 뽑은 헤드라인처럼 아직도 유효하다:

‘군은 내가 두 명의 남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훈장을 주었고, 한 명의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전역시켰다’[각주:4]



1975년 커밍아웃한 레오나드 P. 매틀로비치 기술하사는 하비 밀크(Harvey Milk)와 함께 70년대 미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게이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두 사람은 참전용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비 밀크는 한국전쟁에서 해군으로, 매틀로비치는 베트남전쟁에서 공군으로 복무했다. 하비 밀크가 55년 전역 후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반면, 매틀로비치는 현역 군인으로서 커밍아웃하고 미국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과 투쟁하는 길을 선택했다.


미국 내 동성애자 인권운동과는 거리가 먼, 그저 플로리다의 게이바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뿐이던 미국 남부 가톨릭 집안 출신의 매틀로비치가 커밍아웃을 하게 된 계기는, 1974년 미 공군 잡지에 실린 한 동성애자 인권운동가의 인터뷰를 읽은 것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운동가가 바로 미군 지적국에서 일하던 중 성적지향이 밝혀져 해고된 이후, 미국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을 개진하던 프랭크 캐머니(Frank Kameny)다. 매틀로비치는 캐머니에게 연락했고, 마침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을 이슈화하기 위한 시범 케이스가 필요했던 캐머니는 매틀로비치에게 주목했다.


캐머니가 매틀로비치를 이 운동의 ‘얼굴’로서 적격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시범적인 케이스이면서 군 당국과 소송까지 하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이 ‘얼굴’은 흠잡을 데 없는 복무이력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했다. 수개월간 전략을 수립한 뒤, 매틀로비치는 자신의 상관을 통해 공군장관에게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성적취향(sexual preference)이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이며, 그럼에도 이 사실이 자신의 업무수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동성애자들을 강제전역시키도록 규정한 “위헌적인” 공군 규정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매틀로비치의 커밍아웃 이후 미 공군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비자발적인 전역 절차를 시작하여 매틀로비치의 “동성애 행위”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매틀로비치는 자신의 “동성애 행위”가 모두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졌고, 근무 시간이 끝났을 때 근무지역 밖에서 21세 이상 성인들과 합의하에 이루어졌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미 공군은 규정에 의해 매틀로비치의 전역을 결정했다. 매틀로비치는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긴 시간 지속되며 연방지방법원과 항소법원 사이를 몇 번 오간 이 소송은 어정쩡하게 종결되었다. 연방지방법원 판사가 미 공군이 강제전역 예외사유에 매틀로비치가 해당하지 않는 점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매틀로비치의 공군 복귀와 진급을 명한 것이다. 미 공군은 복귀와 진급 대신 매틀로비치에게 금전적 합의를 제시한다. 어차피 복귀하더라도 공군은 매틀로비치를 전역시킬 다른 사유를 찾아낼 것이며, 이 사건을 계속 끌어서 연방대법원으로 간다면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은 매틀로비치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었다. 매틀로비치는 합의에 응한다.


이렇게 미국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 철폐를 위한 한 번의 도전이 실패했다. 그러나 얻은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매틀로비치를 필두로 하여, 다른 많은 동성애자 군인들이 커밍아웃하거나 성적지향이 밝혀져 강제전역조치를 당한 뒤에도 소송이라는 방식으로 투쟁을 계속 이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쟁점이 된 사항들이 많았다. 군대의 기강과 평온을 해치는 위협적인 존재로서의 동성애자가 아니라, 훌륭한 근무평정을 보유한 기술하사가 강제전역을 당했다. 동성애자 강제전역 조치로 미군이 많은 비용을 들여 양성한 훌륭한 인재들을 잃고 있다는 강력한 차별 철폐 논거가 등장했다. 나라를 위해 해외에서 싸운 참전용사가 그 쓰임을 다한 후 국가로부터 버려졌다는 사회계약 위반 또한 비판 지점이 될 수 있었다. 70년대 미국 동성애자 인권운동 전반이 그러했던 것처럼,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 철폐 운동 또한 하나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고, 이렇게 형성된 여론을 통해 궁극적인 승리를 얻어낼 날이 머지않은 것처럼 보였다.





HIV/AIDS 위기




1980년대 미국 게이 커뮤니티에는 이른바 ‘게이 암(Gay Cancer)’이 창궐했다. 치료법이 없는 면역저하와 이로 인한 합병증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았다. 소위 ‘에이즈 위기(AIDS Crisis)’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 의료당국은 이 병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남성 동성애자 면역결핍증(Gay-Related Immune Deficienc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게이 커뮤니티의 사람들은 죽어가고, 의료당국의 대응은 적절하지 않았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병을 옮긴 더러운 자들이라는 낙인을 짊어졌다. 죽은 친구들을 추모하고, 정부에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며, 세이프 섹스를 강조하는 등 이후 적어도 20년간 미국 게이 커뮤니티의 성격을 규정하는 공통의 정서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NAMES Project AIDS Memorial Quilt in Washington D. C., 1996



전선의 재정비가 필요했다. 미 국방성은 1981년 지침을 개정하여 동성애자의 강제전역에 예외를 두는 조항을 없앴다. 몇 번의 소송에서 이 예외조항의 존재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처했기 때문이다. 개정된 조항의 위헌성이 문제시되었으나, 미 연방대법원은 심사를 거부했고, 하급심 법원들에서는 결국 이 조항이 살아남았다. 이제 사법부 차원에서 미국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 문제를 해결할 여지는 없어 보였다. 에이즈 위기 시대 의료지원이나 많은 다른 동성애자 인권 의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의회를 직접 공략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공략의 대상은 물론, 미국 민주당이어야 했다. 에이즈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 동성애자 로비 단체들은 자원과 인력을 모으며 역량을 총동원했다.


1986년, 레오나드 매틀로비치는 HIV에 감염된 것으로 확진되었다. 시험적으로 도입된 AZT 요법을 받았으나 예후는 좋지 않았다. 매틀로비치는 HIV/AIDS에 부적절하게 대처한 레이건 행정부를 비판하는 운동을 지속하다가, 1988년 6월 사망한다.


1990년, 매틀로비치 이후 커밍아웃하거나 성적지향이 드러나 강제전역당한 미국 동성애자 전역군인들이 모여 ‘평등한 권리를 위한 미국 전역군인(American Veterans for Equal Rights)’이라는 최초의 LGBT 전역군인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설립을 주도한 것은 1975년 성적지향이 드러나 강제전역당한 레즈비언 미리엄 벤-샬롬(Miriam Ben-Shalom)이었다.





클린턴 행정부와 Don’t Ask, Don’t Tell




빌 클린턴과 아버지 부시가 맞붙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은 논쟁지점이 되었다. 빌 클린턴은 선거운동기간 중 동성애자에 대한 군대 내 차별을 철폐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는 정치세력화를 꾀한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거둔 소기의 성과로 보였다.


클린턴은 당선되었다. 그러나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있어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의회 안에서, 심지어 국방위원회의 중심적 역할을 맡은 민주당 샘 넌 상원의원이 앞장서서 차별 철폐에 반대했다. 군대 내부의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이 앞장서서 반대했다. 오히려 전직 공화당 상원의원이자 퇴역 소장인 베리 골드워터가 “총을 똑바로 쏘기 위해 스트레이트일 필요는 없다(You don’t have to be ‘straight’ to shoot straight)”라며 차별 철폐를 지지했고, UC Davis의 그레고리 헤렉을 필두로 한 심리학자들이 그 근거를 제시하였지만 반대는 거셌다. 1993년 도입된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은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타협안이었다.


미합중국 국방부 지침(Department of Defense Directive) 1304.26이 1993년 12월 21일 발의되어, 1994년 2월 28일 효력이 발생함으로써 DADT 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지침에서 미 국방부는 미군 입영의 자격요건을 규정한다. 연령, 국적, 교육수준, 적성 등의 조건과 함께 이 지침은 ‘동성애 행위(homosexual conduct)’를 언급하고 있다. “미군에서 사람의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 동성애 행위로 표출되지 않는 이상 성적지향은 군복무를 막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E1.2.8.1.) 입영대상자들은 자신의 성적지향을 탐문받거나 밝히기를 요구받지 않을 것이고, 독립적인 증거가 없는 한 이는 조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독립적인 증거 또는 자발적인 고백을 통해 동성애 행위에 개입되었음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동성애자도 미군에서 복무할 수 있다. 이것이 DADT 정책의 골자였다.


이후 동성애자를 괴롭히는 자들을 처벌하는 조항이 추가됨으로써, 이 정책은 “묻지도, 말하지도, 찾지도, 괴롭히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Don’t Pursue, Don’t Harass)” 정책이 되었다. 1999년 베리 윈첼(Barry Winchell) 일병이 증오범죄로 살해되자, ‘괴롭히지 말라’ 부분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타협은 근본적으로 나쁜 타협이었다. DADT 정책 하에서도 동성애자임을 드러낸 오픈리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군대에 남을 수 없었다. 여전히 동성애 행위의 강력한 심증이 있는 경우 군 당국은 조사를 통해 동성애자들을 강제로 전역시킬 수 있었다. 성적지향을 드러내는 것이 규정 위반이기에, 어떤 괴롭힘이 성적지향에 근거한 것이란 점을 입증할 수 없어 괴롭히는 행위를 처벌하기란 극히 힘들었다. 자신의 성적지향을 밝혀서 강제전역당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남의 성적지향을 탐문하여 규정위반으로 조치된 사람은 없었다.


결국 성적지향을 드러내지 말고 비가시화된 상태로 남아 있으라는 차별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았기에, DADT는 군 기강을 지키면서 동시에 군대 내 동성애자들을 ‘보호’하는 타협안이란 명분에도 불구하고 미군 내 동성애자들의 현실을 바꾸어놓지 못했다. DADT 정책에 의하면 어떤 동성애자도 자신의 성적지향을 드러낼 수 없다. 설령 본인이 스스로 선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정책은 동성애자의 안정적인 군복무를 보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 정책은 마음에 들지 않는 병사를 동성애자로 몰아 군대에서 쫓아내거나 괴롭히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는 다양한 동성애자 인권 의제에서 이러한 나쁜 타협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1996년 연방대법원이 Romer v. Evans 사건에서 주 정부가 LGBT를 우대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주 헌법개정안이 연방헌법 위반이라고 판결하자, 연방의회는 반동성애적 역풍에 휩쓸린 나머지 ‘혼인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을 입법하여 연방법상 혼인을 이성 간 혼인으로 한정했다. 클린턴은 마침 1996년 재선되었고, 여소야대 상태에서 정치적 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한 상황이었다. 90년대 미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전향적인 스탠스를 가진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호재를 맞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진전을 이루어내기 힘들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만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96년 도입된 에이즈 칵테일 요법은 HIV 감염인의 기대여명을 연장하면서, 감염인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한편 AIDS에 드리워진 낙인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댄 최(Dan Choi)의 커밍아웃




9.11 테러에 이은 아들 부시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 사회와 군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동안, 미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었다. 민주당 안에서 로비의 끈은 촘촘해졌고, 동원가능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분야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여론전이었다. 2000년대를 거치면서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승인 여부, 동성혼에 대한 찬반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의 결과는 완전히 뒤집혔다. 조직된 혐오의 세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동성애자 집단에 대해 호의적인 응답이 반수를 넘는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 내 동성애자 인권 의제의 향방을 예고하는 듯 했다. 댄 최 중위가 등장한 것은 이 시점의 일이었다.


1993년 DADT가 의회에서 입법된 직후,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 내 법률지원 네트워크(Servicemembers Legal Defense Network)’가 결성된다. 클린턴-부시 행정부 기간 동안 SLDN은 어떤 경우 DADT에 의해 강제전역당한 군인들의 소송을 지원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커밍아웃하지 않을 것을 조언하기도 하면서 동성애자 군인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방안을 찾았다.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군 내 동성애자들의 기대감은 커졌고, 현역을 포함한 광범위한 당사자들이 모임을 결성했다. 2007년 공군사관학교 졸업자 LGBT의 모임인 ‘블루 얼라이언스(Blue Alliance)’가 결성되었고, 이를 모델로 삼아 2009년 웨스트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자 LGBT 모임인 ‘나이츠 아웃(Knights Out)’이 결성되었다. 댄 최 중위는 나이츠 아웃의 초대 대변인이었다.


한국인 이민자이자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댄 최는 주 하원의원의 추천을 받아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환경공학과 아랍어를 이중 전공하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남긴 이라크 파병기간 후 그는 육군 예비역으로서 뉴욕 주에서 일하다가, 난생 처음으로 게이 라이프를 향유하며 (이제는 전 애인이 된) 구찌의 임원 매튜 킨제이를 만났다. 2009년 3월 나이츠 아웃의 결성 소식을 다루기로 한 레이첼 매도우 쇼는 현역 군인이면서 나이츠 아웃의 간부인 사람을 원했고, 댄 최가 캘리포니아에서 위성연결로 출연하게 되었다.




레이첼 매도우: 나이츠 아웃 결성에 참여하면서 당신은 DADT 정책 중 ‘말하지 말라’는 부분을 위반하는 거죠. 오늘 이 쇼에서 커밍아웃함으로써… 당신이 군대에서 쫓겨날 위험이 진짜로 존재하나요?

댄 최: 물론이죠. 그리고 지난 15년간 이 정책 때문에 실제로 군대에서 쫓겨난 12,500명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츠 아웃은 웨스트포인트 졸업자 모임으로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댄 최가 가장 강조한 메시지는 이 커밍아웃이 “옳은 일”이라는 점이었다. 사회의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군대 또한 모든 성별과 성적지향이 평등하게 다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DADT 정책 하에서 동성애자들은 군대에 남기 위해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적극적인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한다. 댄 최에 따르면 이 정책은 항상 정직해야 한다는 군인의 복무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비도덕적(immoral)”인 정책이다. 미군 내 동성애자들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성적지향을 까발려야하는 관심종자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직장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는 도덕률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 수사의 핵심이었다.


이 수사의 파급력은 컸다. 이후 미군으로부터 강제전역 조치를 당하면서, 댄 최 중위는 DADT 정책 폐지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많은 언론과 인터뷰를 했고, 허핑턴포스트에 글을 썼으며, 샌프란시스코 자긍심 행진에서는 대오 선두에 섰다. 구글에서 DADT를 검색하면 댄 최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관검색어였다. 많은 언론이 댄 최의 용기를 찬탄했다.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댄 최는 정직한 삶을 살려다 비도덕적인 제도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DADT 정책이 폐지되어야 한다며 입을 모았다. 여론이 무르익고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노력




오바마 행정부는 초대 국방장관으로 전임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를 유임하였다. 보수적인 로버트 게이츠 장관 휘하의 국방부가 시행한 2010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자신의 성적지향을 공개한 동성애자의 복무는 군의 전투력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었다.[각주:5]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새로운 증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1957년에 발간된 미 해군의 ‘크리텐든 보고서(Crittenden Report)’에서도 군대 내 동성애자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결론이 나 있었다. DADT 정책이 도입될 당시에도 저명한 군 심리학자들을 비롯한 미국 심리학계는 미군 내 동성애자 차별의 완전한 철폐를 지지했다. 문제는 이러한 데이터를 비공개하기로 결정하고, 동성애자의 복무를 금지한 관행을 수호하려 드는 의사결정권자들과 여론에 있었다. 대통령 선거운동 중 DADT 정책의 철폐를 약속한 오바마가 돌파해야 할 장애물은 이런 것이었다.


여론은 확실히 우호적으로 변해 있었다. 모병제 국가인 미국에서 군복무는 하나의 직업이면서, 빈곤층의 경우 안정적인 복지혜택을 확보할 수단으로 작용한다. DADT가 동성애자들의 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이전과 달리 설득력을 확보했다. 그리고 얼굴을 드러낸 당사자들이 40여 년간 활동하면서 쌓아온 맥락이 있었다. 70년대 매틀로비치와 2009년 댄 최가 던진 메시지의 골자는 변하지 않았지만, 미국인들의 관점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행정부 고위직들 또한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10년 연두교서에서 오바마는 “의회 및 군과 협조하여 동성애자 미국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나라를 위해 복무하지 못하게 만드는 법을 철폐할 것”을 약속했다. 로버츠 게이츠 국방장관과 마이클 뮬렌 합참의장도 DADT 정책 폐지를 지지했다.


문제는 입법부였다. DADT 정책 폐지운동가 중 일부는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이 정책을 폐지하는 간편한 방법을 조언하였으나, 오바마는 의회를 통해 폐지 수순을 밟는 정치적 부담이 덜 한 방법을 선호했다. 민주당이 다수당인 하원에서 ‘2010년 Don’t Ask, Don’t Tell 폐지법안(Don’t Ask, Don’t Tell Repeal Act of 2010)’은 과반의 찬성을 얻었으나, 상원에서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의사진행 방해(filibuster)를 돌파하는 데 실패해 통과되지 못하였다.


의회를 주시하던 동성애자 군인들은 실망했다. 행정부 입장에서도 이는 곤란한 결과였다. DADT 정책이 도입된 후 수차례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연방법원들은 이 정책이 연방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려온 바 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대통령의 의사에 반하는 이 정책을 소송에서 적극적으로 옹호할 수 없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패소위험이라는 비용으로 돌아왔다. 공화당 내 LGBT 모임인 ‘통나무집 공화당원(Log Cabin Republicans)’들이 DADT를 이유로 2004년 제기한 연방소송의 심리도 2010년 시작되었다.


2010년 11월 말 합동참모본부는 DADT 정책 평가보고서[각주:6]를 발간하였다. 미군 전체 인원 중 30%는 성적지향을 밝힌 동성애자를 군대 내에 받아들인다면 부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전투병과에서 이 응답은 4-60%까지도 치솟았다. 69%는 자신이 이미 동성애자 군인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어 보인다고 답변하였으며, 그 중 92%의 응답자는 자신에게 그 경험은 오히려 긍정적이거나 어떠한 영향도 없었다고 답변하였다. 이 데이터에 대한 해석은 갈렸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행정부의 소송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조속한 즉시 폐지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선 군 관료들은 즉각 폐지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폐지 로드맵 등에 관하여는 각자 다른 의견을 보였다.


2010년 12월 DADT 정책의 폐기를 예정한 수정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대통령, 국방장관, 합참의장이 DADT의 폐지가 “군의 준비태세, 효율성, 병영통합, 모병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 60일의 유예기간을 둔 후 이 정책을 폐지한다는 로드맵을 명시하고 있었다. 결국 DADT 정책은 폐지되지 않은 채 해를 넘기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폐지가 이루어질 것인지는 불확실했지만, 적어도 폐지를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Don’t Ask, Don’t Tell의 종국




2011년 1월 말 미 국방부는 2월부터 DADT 정책 종료를 대비한 군대 내 교육과정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같은 시기 의회 일각에서는 DADT 정책의 종료를 지연하기 위한 일부 의원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 노력은 2011년 6월까지 지속되었지만, 다행히 성공하지 못했다.


2011년 내내 미군은 동성애 혐오성 문화를 드러내고 이를 자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주한미군 용산기지에서도 대령 세 명이 동성애자들을 희화화하는 짧은 역할극을 공연하고 주의를 받는 일이 있었다. DADT 정책의 폐지가 군목(軍牧)들로 하여금 동성결혼을 집전하도록 강제하는 전 단계라는 미 해군 내 괴문서가 제보되어 비판을 받았다. DADT 정책 폐지는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 철폐의 1단계이지만, 절대로 끝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명확해져 갔다. 진정한 평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우선 DADT 정책 자체가 하루 빨리 폐지되어야만 했다. 어떤 군인들은 이 시기 항의의 방법으로 스스로 커밍아웃하여 여전히 유효했던 DADT 정책에 의해 강제전역조치를 당하기도 하였다.


DADT 정책의 폐지 입법이 하나의 성과라면, 이 성과는 선출직, 고위관료, 동성애자 인권운동과 로비, 스스로를 드러낸 동성애자 당사자들이 함께 이루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느린 추이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댄 최는 점진적인 DADT 정책 폐지라는 타협점을 찾은 2010년 입법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의회가 폐지 입법을 논의하던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DADT 정책의 즉시 폐지를 촉구하였으며, 백악관 창살에 스스로를 수갑으로 채우는 시위를 두 번 한 끝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점진적 폐지 입법으로 가닥이 잡히고 그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댄 최는 의회, 행정부, 그리고 휴먼라이츠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 등 동성애자 인권운동단체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그의 말을 현실을 모르는 자의 어리석음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정의는 정말로 서서히,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서라도 결국 오고야 만다. 2011년 7월 22일 오바마 대통령, 교체된 레온 파네타 국방장관, 마이클 뮬렌 합참의장은 ‘2010년 DADT 폐지 법안’이 요구한 요건이 만족되었다는 사실을 인증하였다. DADT 정책이 폐지될 날이 정해졌다.



미합중국군 총사령관으로서, 저는 이 나라의 헌신적인 군인들이 병영통합, 모병, 효율성을 해치지 않는 질서정연한 태도로 새로운 정책에 적응할 것이란 점을 오래 전부터 확신해왔습니다. […] 9월 20일부터 미군의 구성원들은 국가에 복무하기 위해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군은 이제 어떤 충성스러운 군인들이 게이 또는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재능과 기량을 잃지 않아도 됩니다.

_오바마 대통령, 2011년 7월 22일 성명






9월 20일. 그간 J. D. 스미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던 미군 내 LGBT 활동가 조슈아 시프리드(Joshua Seefried) 공군 중위는 이 날을 기념하며 자신의 실명을 밝혔다.




101명의 동성애자 병사들이 잡지 화보로 커밍아웃했다.





게리 로스(Gary Ross) 해군 중위는 12시가 되는 순간 동성 파트너와 결혼했다.






퇴역 해군 소장 앨런 스타인맨(Alan Steinman)도 커밍아웃했다. 그는 이날 커밍아웃한 전현직 군인 중 직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병영의 문화가 바뀌었다.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기지의 파병 군인들이 성소수자 청소년들을 응원하는 “삶은 나아집니다(It Gets Better)” 프로젝트 동영상을 촬영하여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해군 함정 귀항 의식에서 키스를 하는 커플로 동성애자 군인과 그의 파트너가 선정되기도 하였다. 군목들이 동성결혼을 주재할 수 있게 되었고, 군대 안에서도 동성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2012년 샌디에이고 자긍심 행진에 동성애자 군인들이 군복을 입고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동성애자들은 더 이상 자신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역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독립전쟁 시기부터 “변태적 성행위”를 이유로 군대에서 처벌받았고, 동성애자라는 심증만으로도 군대에 남을 수 없었던 긴 세월이 과거의 것이 되었다. 동성애자 군인을 보호하겠다면서 17년간 15,000여 명의 동성애자 군인을 강제전역으로 몰아넣은 나쁜 타협책이었던 DADT가, 마침내 폐지되었다.





폐지 이후




DADT 정책이 폐지되는 과정에서 커밍아웃하고 강제전역 절차를 밟은 사람들 중에는 요건을 갖추어 군대로 복귀한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웨스트포인트 재학 중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후 자퇴한 캐서린 밀러(Katherine Miller)는 재입학을 거부당한 뒤 예일 대에 진학했다.


댄 최는 여전히 민간인이다. 고통스러운 형사소송은 2013년까지 이어졌다. 강연과 토론회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한 때 DADT 정책 폐지운동의 상징이었던 댄 최는 더 이상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2011년 이후 그의 삶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매튜 킨제이와 헤어졌고, 게이 데이팅 앱 그라인더에서 간혹 목격된다. 부모와 형과는 절연했다. DADT 정책이 없어진 뒤 그의 삶을 조명한 르포 기사[각주:7]가 있고, 한국계 미국인 여성 코미디언이자 패그해그(게이와 친한 여성) 캐릭터인 마가렛 조가 자신의 블로그에 댄 최에겐 휴식이 필요하다는 글[각주:8]을 쓴 적이 있다. 2011년 이후의 그에 관하여 찾을 수 있는 기록은 이 정도다. 『뒤로』 편집진은 댄 최와의 인터뷰를 타진하였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15년이다. 2013년 연방 차원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들었던 혼인보호법 제3조를 위헌으로 판단한 United States v. Windsor 판결이 내려지자, 드디어 국방부도 군인들의 동성 배우자들에게 배우자 혜택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미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을 법제화한 Obergefell v. Hodges 판결을 내림으로써 미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가장 큰 제도적 차별 하나를 종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9월 중순, 오바마 대통령은 오픈리 게이인 에릭 패닝(Eric Fanning)을 육군장관으로 임명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 관료다. 그럼에도 그는 국방부 안에서 가장 고위직에 오른 오픈리 동성애자이기에, 그의 임명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DADT 정책을, 지난했던 차별 철폐의 과정을, 그리고 미국의 동성애자들이 만들어낸 변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2016년, 한국에서




미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거둔 성취를 소개하다 보면 몇 가지 범주의 피드백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적 맥락’을 소개하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언하는 글이 서로 다른 한국과 미국 성소수자들의 상황을 단선적으로 비교하여, 한국 성소수자들의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부당한 비난에 힘을 실어줄 뿐이라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다. 혹은 그 ’미국적 맥락‘을 칭송하면서 반대로 ‘헬조선’의 현실을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 귀담아들을 만한 부분이 있는 의견이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전제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미국 동성애자 운동의 성취가 ‘내 삶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 타국의 일’이라는 전제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미군 내 동성애자 차별 철폐운동의 방식이 한국에 바로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할 것이다. 제도가 다르고, 논점도 다르다. 한국에서도 당장 저들이 했던 일들을 그대로 따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운동사가 내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수의 성적지향을 가지지 않았다는 정도의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제도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협업했던 역사의 기록에서,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미국이 처음부터 성소수자들의 천국이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도 천국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성소수자들이 얻어낸 성과의 배경에는 조금씩 사회를 바꾸어 나간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현실이 답답하여 변화가 간절하다면,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투자를 시작해야 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힘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 ‘미국적 맥락’에서만 효력을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군 내 동성애자 차별 철폐운동의 역사를 거칠게 요약한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이 느낀 감정이 저들의 상황에 대한 ‘부러움’과, 그것이 내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뒤의 ‘현자타임’만은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금 한국에 사는 성소수자로서, ‘내 권리’를 챙기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동료가 많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가 언젠가, 어디에선가, 그런 동료로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MECO

미국에선 70년대에 끝난 LGBT/퀴어/성소수자 운동에 관한 이야기들을 씁니다. 인격은 트위터에 업로드해두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Queer In SNU,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에서 활동했습니다. 프로 대자보러.

e-mail: meco.vibre@gmail.com, twitter: @meco_vibre


  1. 동성에 대한 낭만적/성적 이끌림을 가진 사람들을 ‘동성애자’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것은 1800년대 후반의 일이다. [본문으로]
  2. 징병제 국가인데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엄연한 인권사안인 한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특히 현대에 들어 미군 복무는 어떤 이들에게는 금전적, 직업적인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강제전역 자체가 기본권 침해사안이 되며, 또한 그 형태가 명예전역이 아니라는 것은 이후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하여 당사자들의 삶을 위협하였다. [본문으로]
  3. 통일군사법전의 모체가 된 1928년 미전시법을 그대로 번역한 해방조선의 국방경비법 제50조는 지금도 한국 군형법 조문으로 살아남아 있다. ‘계간’이라는 비하적 어휘가 ‘항문성교’로 대체된 군형법 제92조의6(추행)이다. [본문으로]
  4. Lisa Leff, 「Exhibit Examines History of Gay Veterans」, 『Associated Press』, 2007. 6. 21,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7/06/21/AR2007062100225.html) [본문으로]
  5. DADT가 도입되는 데 크게 기여한 샘 넌 전 상원의원은 이 때 “어떤 인사정책이든 15년이 지났으면 다시 살펴보는 것이 좋다. 일단 국방부의 조사부터 시작하자.”라며 태도를 바꾸었다. [본문으로]
  6. 미국 국방부(US Department of Defense), DADT 정책 종합검토 전담그룹 보고서(“Don’t Ask, Don’t Tell” Comprehensive Review Working Group Report), 2010. [본문으로]
  7. Gabriel Arana, 「The Passion of Dan Choi」, 『The American Prospect』, 2014, (http://prospect.org/article/passion-dan-choi) [본문으로]
  8. Margaret Cho, “Lt. Dan Choi on Trial”, (http://margaretcho.com/2013/03/25/lt-dan-choi-on-tria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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